나는 개발자가 아니다
코드보다 화면 흐름을, 함수보다 문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AI라는 손이 생겼다.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나는 20년 넘게 IT 업계에 있었지만 개발자가 아니다. 만드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행복한 서비스를 만들고 싶은 서비스쟁이, 뼛속까지 기획자다. 코드보다 화면 흐름을, 함수보다 문장을, 아키텍처보다 "사용자가 이 순간 무슨 기분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부류.
그런 사람에게 지난 20년간 앱을 만든다는 건 이런 뜻이었다: 기획서를 쓰고, 개발자를 설득하고, 일정 협의를 하고, "그건 공수가 커서요"라는 말 앞에서 기능을 접고, 출시일이 밀리는 걸 지켜보는 일. 아이디어와 출시 사이에는 늘 다른 사람의 손이 필요했고, 그 손은 늘 부족했다.
그 구조에서 기획자가 익히게 되는 기술은 좀 서글프다. 회의 전날 밤에 하던 생각들:
- 어떻게 쪼개야 개발자가 덜 부담스럽게 느낄까
- 어느 요구사항을 먼저 포기해야 나머지가 살아남을까
- 이번 스프린트를 놓치면 다음 분기니까, 지금 무엇을 우겨야 할까
만들고 싶은 것을 그리는 시간보다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깎는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깎이고 남은 것이 출시되고, 그걸 보면서 "원래 생각은 이게 아니었는데"라고 혼자 생각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 달라진 건 하나다. 그 손이 AI가 됐다. 나는 여전히 기획자의 일을 했다 — 결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품질을 확인하고, "이건 아닌데?"라고 지적하는 일. 코드는 한 줄도 직접 쓰지 않았다. 대신 AI 팀원(Claude Code)에게 시켰고, 그 팀은 불평 없이, 밤낮없이, 그리고 놀랍도록 꼼꼼하게 일했다.
가장 크게 바뀐 감각은 "해볼까?"와 "해보자" 사이의 거리였다. 예전에는 아이디어 하나를 검증하려면 최소한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려야 했으니, 어지간히 확신이 서기 전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궁금하면 그냥 시켜보면 된다. 아니면 되돌리면 그만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버려진 방향도 꽤 많은데, 예전 같으면 그 시도들은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패의 비용이 내려가니 시도의 총량이 올라갔다.
이 글은 그 열흘의 기록이다. 기획자의 눈으로 본, AI 팀과의 협업기.